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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 열두 띠동물의 의미 2 : 말띠, 양띠, 원숭이띠, 닭(봉황)띠, 개띠, 돼지띠

2018-01-04


십이지신 열두 띠동물은 동양학의 사유를 바탕으로 배정된 것인데, 이를 모르면 그 의미를 오해하기 쉽다.

동양의 옛사람들은 ‘각득기소各得其所’라 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에게는 각자의 소임이 있다고 가르친다.

때와 장소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소임(천명天命)이 있으며,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함으로써 우주의 순환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십이지신 띠동물의 경우도 다음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각자의 자리를 지켜면서 순서를 이어받아 맡은 바 소임을 다함으로써 우주의 순환에 기여하고 있다.


ⓒ 사주인, 2017

말[午]

말은 망종芒種과 하지夏至 절기를 품은 오화午火의 소임을 맡은 띠 동물이다.

“망종에는 불 때던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일년 중 가장 바쁜 시기이다.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확장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는 일년 중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가장 긴 날이다. 햇빛이 대지에 폭사하면서 대지의 만물은 성장의 열기, 성장의 욕망으로 꿈틀댄다. 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이다.

오午의 한자 모양은 절굿공이 같은 모양을 한 막대의 형상이다. 땅에 막대를 꽂은 해시계로 시간을 확인할 때 정오正午가 ‘한낮’을 의미했던 데서 파생된 글자이다. 오화午火의 기운을 정오의 작렬하는 태양빛의 기운에 비유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절기 및 시간대의 특성이 그대로 오화午火의 특성이며 또한 말의 특성이다.

질풍노도처럼 거칠 것 없이 내달리는 동물이 말이다. 오화午火의 기운이 바로 그러하다. 하루만에 천리를 달려갈 기세를 가진 천리마인 것이다.

그에 따라 말띠들은 열정적이고 활동적이며 자신감이 넘친다. 용모·언변·풍기는 분위기가 화려하여 남의 이목을 끈다.

표현욕구가 강해서 말이 많은 편이며, 시원시원한 스타일이다. 그에 따라 친구가 많다.

하지만 주변을 차분하게 돌아보는 성격은 아니며 끈기와 인내심이 부족하다.

양[未]

양은 일년 중 가장 더운 대서大暑 절기를 품고 있으면서 곧 다가올 가을을 예비하는 미토未土의 소임을 맡은 띠 동물이다.

서두의 그림을 보면 양[未]은 소[丑]와 마주보고 있다. 이는 양[未]의 소임과 작용이 소[丑]와 반대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명리학에서는 이를 지지 미未와 축丑이 서로 충沖을 이룬다고 표현한다.

앞서 소[丑]는 겨울을 매듭짓고 새 봄을 맞아들이는 소임을 담당했다. 이는 음기운의 흐름을 양기운으로 돌려세우는 과업이다. 이에 비해 양[未]은 여름을 매듭짓고 가을을 맞아들이는 소임을 감당해야 한다. 이는 양기운의 흐름을 음기운으로 돌려세우는 과업이다.

대서 절기를 품고 있는 미월未月(음력 6월)은 장마철과 더불어 일년 중 가장 더운 시기이다.

하지에 가장 높이 뜨는 태양이 한 달 시차를 두고 대서 절기에 가장 큰 더위를 만든다. 여기에 장마철의 높은 습도가 더해지면서 생명의 탐욕(성장의 욕구)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처럼 강력한 양기운의 흐름을 음기운으로 돌려세우려면 정면으로 맞서는 뚝심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그 때문에 하늘은 양띠들에게 소띠의 뚝심 대신에 용의주도함과 화이불류和而不流(조화를 이루되 휩쓸리지는 않음)하는 리더십의 자질을 부여하였다.

미未의 한자 모양은 나무[木] 위에 나뭇가지[一]가 하나 더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나무에 원래 있던 하나의 가지로 충분한 것인데 사족으로 가지 하나가 더 붙었다. 이는 ‘과잉’이다. 그래서 미未자가 ‘아니다’는 뜻을 갖는 것이다.

12지지 중 미토未土의 작용은 짐짓 ‘과잉’을 유발, 조장하는 것이다. 여름의 양기운(화火기운)이 극단적인 과잉에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가을의 음기운(금金기운)으로 돌아설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토는 화火기운이 절정에 이르도록 그 완성을 돕는다.

동물로서 양은 무리를 이루어 산다. 12지지 띠 동물 중에서 무리를 짓는 동물은 양과 그 다음을 이어받는 원숭이뿐이다.

양은 자신이 속한 무리의 전반적인 흐름을 따라갈 뿐 그 흐름을 바꾸도록 직접 지시하는 일은 없다. 반대로 무리의 흐름에 휩쓸려 자신의 소임을 잊는 일도 없다(화이불류和而不流).

양은 무리의 기존 추세를 더욱 부추겨서는 과잉에까지 이르도록 유도한다.

그러고 나서 과잉의 부작용으로 추세가 무너지면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반대방향으로 흐름을 돌려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띠들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가서는 시치미를 뚝 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 만큼 뱃심이 두둑하며 비위가 좋다.

척박한 땅,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견뎌내며 사람들과 무난하게 잘 어울린다.

하지만 자신의 소임을 망각하는 일은 없으며, 용의주도한 리더십을 지닌 사람들이다.

양띠는 주역괘로는 둔遯괘에 해당한다.

둔괘는 물러날 때를 알고 적절한 시기에 물러나는 지혜를 가리킨다. 이처럼 양띠들은 때를 알고 때에 맞추어 행동할 줄 아는 지혜를 가졌다.

원숭이[申]

원숭이는 입추立秋 절기를 지나 가을을 새로 여는 신금申金의 소임을 맡은 띠 동물이다.

신申의 한자 모양은 번개불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옛사람들은 ‘하늘이 자신의 뜻을 펼쳐 보인 것’이 곧 번개[申]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申자가 ‘펼치다, 알리다, 말하다’ 같은 뜻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이 신금申金을 통해 펼쳐 보이는 뜻은 무엇일까?

이제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었으니 성장의 욕심은 버리고 ‘결실’을 맺으라는 것이 신금申金을 통해 펼쳐 보이는 하늘의 뜻이다.

열매와 알곡이 살지려면 에너지가 그 안에 응축되어야 하므로 성장은 멈추어야 한다. 성장을 멈추고 에너지를 응축하여 결실을 맺도록 하는 것이 신금申金의 소임이다.

원숭이[申]는 양처럼 무리를 짓는 동물이다. 양과 다른 점은 무리에 위계질서가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원숭이는 공동체의 무리에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자기 주장을 희생할 줄 아는 동물이다.

또한 원숭이[申]는 먼저 온 양[未]과 힘을 합쳐 가을을 여는 동물이다.

이는 신월申月에 말복末伏이 있고, 앞선 미월未月에 초복初伏과 중복中伏이 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복伏’은 하늘의 가을 기운인 경금庚金을 매복시켜놓았다는 말이다(복날은 모두 경일庚日이다).

이처럼 원숭이[申]는 양[未]과 비슷하게 경금을 매복시켜놓고는 짐짓 딴청을 피울 줄 아는 용의주도함을 지녔다.

원숭이띠가 지혜롭다는 평을 얻는 것은, 합리적 판단을 통해 자기 주장을 낮추고 공동체의 무리와 융화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대체로 대인관계가 원만하며 조직생활에 잘 적응하는 편이다.

원숭이띠가 창조보다는 모방(응용)에 능한 이유는, 일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노력을 수습해서 가을의 결실을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숭이띠는 주역괘로는 비否괘에 해당한다.

비괘는 양효 셋이 음효 셋에 둘러싸여 막혀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제 양기운의 성장하려는 욕구를 접고 결실을 맺으라는 뜻으로, 원숭이띠의 소임과 일치하는 것이다.

닭(봉황)[酉]

닭은 수확의 계절인 백로白露와 추분秋分 절기를 품고 있는 유금酉金의 소임을 맡은 띠 동물이다.

백로白露의 아침 이슬은 열매와 알곡이 굳고 단단하게 영글도록 재촉한다. 백로 때부터 빠른 쌀 수확을 시작하며 햇사과도 나온다.

자칫 수확의 시기를 놓치면 일년 동안의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만다. 이제 서둘러 한 해의 노력을 마무리짓고 애써 이룬 성과를 거둬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유월酉月은 수확의 계절이다.

유酉의 한자 모양은 술동이의 형상이다.

전통시대에는 추수가 끝나면 술을 빚어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벌였다. 그러므로 술이 익어가는 술동이의 형상을 통해 유금酉金의 소임을 형상화한 것이다.

유월酉月에는 우선 때를 놓치지 말고 일년 동안 기울인 노력의 결실인 열매와 알곡을 따내야 한다.

그리고 술을 빚어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벌임으로써 성과를 골고루 나누어 공동체의 결속을 다진다.

닭은 이러한 유금酉金의 소임을 맡은 띠 동물이다.

(닭은 『적천수천미滴天髓闡微』에서는 봉황[鳳]으로 나온다. 원래는 봉황이었는데 닭으로 바뀐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닭띠는 봉황띠일 수 있다)

닭은 때를 아는 새다. 모두가 잘 때도 자지 않고 깨어있음으로써 때를 놓치지 않고 결실을 따낸다.

닭은 또한 벼슬을 달고 있는 새다. 수확을 거둔 후 공동체에서 성과를 나눌 때 누구 한 사람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모두를 배려하고 공정하게 관리함으로써 전체의 조화를 이뤄낸다.

닭띠는 주역괘에서는 관觀괘에 해당한다.

‘관觀’은 차분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이는 유금酉金의 소임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닭띠들은 때를 놓치지 않는 결단력이 있다.

또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전체의 흐름을 보아내는 안목이 있다. 이를 통해 적절하게 모두를 배려함으로써 전체의 조화를 꾀할 줄 안다. 리더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개[戌]

개는 찬이슬이 내리는 한로寒露와 추상같은 가을 서리가 닥치는 상강霜降 절기를 품고 있는 술토戌土의 소임을 맡은 띠 동물이다.

찬이슬이 내리고 곧이어 추상 같은 가을 서리가 닥치는 술월戌月에는 나뭇잎이 붉게 물들어 단풍으로 변한다. 나뭇잎이 물들어 단풍으로 변하는 것은 잎파리가 다음 세대(봄이면 피어날 새싹)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자신을 떨구어 뿌리와 새싹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처럼 술월은 희생의 계절이다. 희생이로되 다음 세대를 위한 긍정적인 희생이다.

술戌의 한자 모양은 날이 좁은 도끼(사람을 죽이는 실전용 무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추상같은 가을 서리가 닥쳤을 때 나뭇잎을 희생시키는 술토戌土의 소임을 비유한 것이다.

술토戌土는 주역괘로는 박剝괘에 해당한다. ‘박剝’은 벗긴다는 뜻이다. 고갱이가 아닌 허례허식, 껍데기를 벗겨버림으로써 본질만을 남긴다는 뜻이다.

박괘는 다섯 음효 위에 양효 하나만 남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 남은 양효는 씨과실로, 이 과실이 땅에 떨어져 씨앗으로 겨울을 넘기고 새 봄이 오면 새싹으로 다시 피어나는 것이다.

옹골찬 씨과실을 남기기 위해 본질이 아닌 껍데기는 술戌로 잘라내버리는 것이다.

두암 한동석 선생은 술토의 덕을 술공戌空이라 극찬하신 바 있다.

세상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서북방(시간상으로는 겨울 직전의 늦가을)에 처했으면서도 묵묵히 미래에 피어날 새 생명과 정신의 요람을 지어내는 성자라는 것이다.

개는 바로 이와 같은 술토의 덕을 상징하는 띠 동물이다.

지난 유월酉月 수확의 기쁨, 떠들썩했던 제사와 잔치도 끝나버린 시간, 세상의 이목이 떠나가버린 시간 속에서도 개는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두암 선생은 이를 일러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초야에 묻혀 있는 성자라고 표현하셨다.

돼지[亥]

돼지는 입동立冬 절기를 지나 겨울을 맞이한 해수亥水의 소임을 맡은 띠 동물이다.

해월亥月은 입동 다음에 오는 소설小雪 절기도 품고 있다.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는 속담이 있다. 소설 즈음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 농사가 잘 되며 다음 해의 농사 역시 잘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겨울 추위는 싫지만 그 역시 소임이 있는 것이다.

해월亥月의 소임은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자신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해亥의 한자 모양은 땅 속에 있는 풀의 뿌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뿌리는 자기 존재의 근본을 의미한다.

겨울을 맞이한 해월亥月에는 지난 봄에서부터 가을까지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그 성과를 근본에 비추어 성찰하는 것이다.

해수亥水는 주역괘로는 곤坤괘에 해당한다.

곤괘의 덕목은 순명順命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천명天命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며 다음 생에서의 순명을 예비하는 것이다.

겨울은 하루로 치면 잠을 자는 시간대에 해당한다. 잠을 잠으로써 다음날을 위해 기운을 응축하는 것이다. 충분한 응축이 이루어져야 새 날이 밝았을 때 기운차게 새로운 날을 시작할 수 있다.

돼지는 이와 같은 해수亥水의 소임을 맡은 띠 동물이다.

돼지는 자신의 근본에 순명하는 존재이다.

돼지는 뱀과 상극인데, 서두의 그림에서도 뱀과 마주보고 있다.

뱀이 영리해서 꾀가 많다면, 돼지는 꾀를 부릴 줄 모른다. 오로지 직진하며, 자기 근본에 충실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돼지가 꾀를 부릴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서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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